12년 만에 창세기 강해를 다시 시작하고, 이번 주말에 있을 창세기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창세기가 새롭게 읽어지고 은혜가 더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론 가운데 중요한 개념이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 13권에서 아주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당신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보니 그들은 아주 있는 것도 아니요, 아주 없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당신께로 부터 왔으니 있는 것이요, 당신처럼 있는 것이 아니니 아주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있는 존재는 항상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고로 당신께 의지하고 사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사람과 모든 만물은 본래 무(無, nihilo)로부터 왔다. 사람과 만물이 허무, 절망, 공허, 죽음, 분산의 위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본래의 모습이었던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성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있는 존재”이지만 무로부터 왔고 하나님처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주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늘 불안하다. 많은 재물을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쾌락에 취해도, 권력의 자리에 가도 불안하고 허무한 근원적 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존재론적 불안정을 극복하는 길은 항상 있는 존재이신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의 오랜 방황을 멈추었다. 나도 주님을 저버리고 5년간 방황한 적이 있다. 그때 내 삶에 드리운 그림자는 허무와 절망, 질병과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가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이 어두움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소망과 생명의 역사로 가득 찬 삶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존재의 근원되신 주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면 금세 어두움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주님이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주님이 공급하시고,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주님이 긍휼이 여기셔야만 사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이 절대적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다. 이 피조물의 어리석음을 어찌하랴!


주님, 저로 하여금 언제나 주님께 꼭 메여 사는 인생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