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유학을 온 쟝 깔뱅은 college de marche와 college de montaigue에서 
인문주의와 엄격한 금욕주의 훈련을 받았다. 특히 몽테규는 새벽 4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고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학업을 지속했다고 한다. 깔뱅은 
여기서 다양한 학문을 익히며 종교개혁자이면서 위대한 저술가가 되는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열악하고 고된 훈련으로 온 몸이 병들어 평생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게 되었다. 당시에 폭풍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시무시한
학장의 학대와 열악한 환경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병들거나 죽어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후에 반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는 
예수회의 창시자 이그나티오스 로욜라도 같은 시기에 이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격동의 16세기 개신교와 가톨릭의 두 영웅이 함께 한 샘이다. 지금은 학교는 
업어지고 그 자리에 sainte genevierve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는 
팡테옹과 파리 1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건너편에는 깔뱅이 오를레앙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에 올라와 잠시 
교편을 잡으며 생활했던 다락방 하숙집이 있다. 파리에 올라 온 깔뱅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써서 출판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파리 대학 
학장이었던 친구 니콜라 콥의 만성절 연설문을 써 주었다가 그 연설문이 종교
개혁 사상을 담은 것으로 판명되어 체포 명령이 떨어져서 하숙집의 지붕을 
타고 도망치게 된다. 이 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은 상황을 통해서 그를 개혁자의 길로 밀어 내신 것이다. 
 그가 살았던 다락방 하숙집을 올려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이렇게 쫓기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자의 고단하지만 영광스러웠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며 가슴 뭉클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