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8월 24일은 개신교회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날이었다. 루브르 앞에서 3천 명이 학살당하고 이 날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약 8만 명의 위그노 들이 학살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는데 바로 <여왕 마고, La Reine Margot>이다. 1997년 8월 24일에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파리에서 열린 세계 가톨릭 청년대회 미사를 집전하면서 이 일에 대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역사의 아픔을 지울 수 는 없는 일이다.
남편 앙리 2세가 자신의 부하 몽고메리와의 마상시합에서 당한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의 왕비였던 까뜨린느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어린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시작한다. 그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을 잠재우고 권력을 안정시키려는 생각으로 공주인 마거릿과 개신교도인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이 일로 사기가 충천해진 위그노들은 그들의 지도자였던 꼴리니 제독과 함께 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루브르 인근에 모여 들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섭정왕후와 가톨릭 동맹 기즈 가의 앙리 공작은 꼴리니 제독의 암살을 시도한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 가자 다급해진 두 사람은 왕을 겁박하고 설득하여 살생부를 위그노 학살 명령을 받아낸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3시에 루브르 앞에 있는 생 제르맹 옥세로와 교회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자행 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세느강에 던져지고 그것의 일부를 거두어 묻은 곳이 바로 오늘날 에펠탑이 세워진 근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Musee du Quai Branly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위그노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결혼식의 주인공이 었던 앙리 4세는 결국 왕의 자리에 올라 발로와 왕가 대신에 부르봉 왕가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가톨릭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고 대신에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열어 준 낭트 칙령을 선포하게 된다.
이 엄청난 순교의 피위에 세워진 프랑스 교회에 곧 부흥의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