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새벽 3 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말과 주일 일정으로 녹초가 된 몸이었지만 독일 개신교 경건주의의 본거지인 헤른후트(Herrnhut)를 간다는 벅찬 마음이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샤워를 하고 주일 설교준비를 위한 개요를 작성한 후에 5 시에 승용차를 몰고 독일로 출발했다. 파리에서 목적지까지 1200km 가 넘는 거리다. 50 대 중반의 나이에 그 거리를 하룻날에 운전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지만 유럽 생활 22 년만에 이제야 가보게 되는 기독교 부흥의 산실에 대한 사모함으로 장거리 운전에 도전했다. 12 시에 프랑크푸르트에 들려서 점심을 먹은 후에 임재훈, 장광수 목사를 태웠다. 임목사는 한국에 보내야 할 급한 원고작업과 몸살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류했고 장목사는 드레스덴에 사는 박선교사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헤른후트에 대해서 안내해 주기 위해서 동행했다. 간만에 함께 하는 수화풍(水化風) 모임이서 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시 600km 를 달렸다. 기독교 미술사 전문가인 임목사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간간히 들려주는 회화, 조각, 건축 이야기는 여행의 맛을 더해 주었다.
    7 시에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CMI 선교사인 박영철 목사님이 자신의 사업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안마 마사지 기계를 판매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독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자비량 선교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전통 레스토랑인 Shiller Garten 에 우리를 초대했고 그곳으로 이동하는 시간과 식사 중에 특유의 부산 사투리와 열정적인 언변으로 드레스덴의 역사와 독일 기독교 경건주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에는 들어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체득한 것을 전하는 깊은 맛이 있었고 그 덕에 책 몇 권은 탐독해야 알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드레스덴은 작센 왕조의 수도였고 욕심꾸러기로 유명한 군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지배했던 곳이고 그가 남긴 건축물들이 오늘날 관광명소가 되어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동서독이 통일하는데 라이프치히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였다. 이곳에서 1989 년 10 월에 시작된 평화시위가 동독 전역에 확산되었고 그 후 한달만인 11 월 9 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 민족에게도 이런 날이 속히 올 수 있기를 기도 드렸다. 이 도시를 방문한 더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개신교 경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필립 스패너가 궁중 수석 설교자로 사역한 곳이고 할레 대학을 세운 아우구스트 프랑케가 필립 스패너를 만난 도시이고 헤른후트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끌며 세계 선교와 세계 부흥 운동의 물꼬를 튼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