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파리는 여행의 로망이다. 파리의 거리는 낭만과 자유와 젊음이 흐르고 가는 곳마다 문화와 예술과 역사의 유적지가 넘쳐난다. 해서 사람들은 내가 파리에서 산다는 이유로 무척 부러워한다. “참 좋은 곳에 사시네요. 부럽습니다. 한번 놀러 가겠습니다.”나는 초청한 바가 없는데 그들은 스스로 자가 초청장을 발부하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 파리는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짓궂은 얼굴 험악한 얼굴로 다가 오기도 한다. 파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디아스포라들의 타향살이가 다 그렇듯 말이다. 가는 곳마다 장애물이 있고 순간마다 풀어야 되는 문제들이 널려 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마음이 피곤해지고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어떤 이는 파리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귀국하기도 한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불어책을 나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 "다시는 파리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런 그가 요즘은 파리 생활을 추억하며 지낸다고 한다. 


    여기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곳이다. 이웃 나라 독일은 원칙을 지킨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나라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예측 가능하고 정도를 걸으면 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예측불허한 곳이다. 어제는 되는 일이 오늘은 안 되고 이 사람은 되는데 저 사람은 안 된다. 이런 경우를 빗대서 "싸데펑, ça dépend !"이라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라는 말이다. 나는 22년을 파리지앵으로 살면서 이런 분위기에 적응해가고 있다. 완전히 적응하면 프랑스 생활을 위한 도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내가 처음 프랑스 생활을 시작한 곳은 크레테이(CRETEIL)라는 곳으로 당시에 체류증 받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지만 당일에 일을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 없는 거절의 쓴잔을 마신 후에 체류증을 받아 들 수가 있다. 그것 받아들고 기쁜 마음도 잠시, 다음 체류증 받아야 하는 날짜가 코앞이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10년짜리 체류증을 신청했다. 10년 문제없이 체류한 사람에게 10년짜리 장기 체류증을 주는 것은 관례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사르코지가 새로운 법을 통과시켰는데 그 안에 10년 체류자에게 장기체류증을 주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체류가 정식으로 거부되는 날에는 프랑스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언제나 떠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7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큰 아들 은광이가 국적을 취득하는 덕에 겨우 10년짜리 장기체류증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생활 17년 만에 얻은 쾌거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어린애처럼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