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고민하거나 망설일 시간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결정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일은 이렇게 진행되는가 보다.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프랑스 선교사로 결정 되고 3개월 만에 고국을 떠나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남들은 좋은 곳에 간다고 부러워했지만 당사자인 나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불어 한 마디 하지 못하는데 살아낼 수 있을까? 음식은 적응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문제는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선교사로 나가는 마당에 사명에 대한 뜨거운 마음보다 이런 사소하고 한심한 걱정이나 하다니. 그럴 때마다 나는 엎드려 기도했고 주님은 내 마음을 다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채워주셨고 용기와 희망을 더해 주셨다.
    나의 꿈은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신학교 시절을 보냈다. 해외 더구나 유럽에서의 사역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은 내 꿈을 꺾으시고 주님의 비전을 이루시는 일에 거침이 없으셨다. 나는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의 계획을 막으시고 유럽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루신 말씀을 묵상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주님의 계획이 있으시겠지.”
     1차 사역 6년 반은 파리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면서 “프랑스가 선교지인가? 여기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선교사역이 무엇인가? 프랑스 개신교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등에 대해서 고민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프랑스 사역의 기초를 다지는 고된 광야 훈련의 기간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사역을 지속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마지막 한해는 선교사 언어학교인 에꼴 쎄드르(Ecole Cedre)에 다니면서 다음 사역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같은 고민을 하며 언어공부를 하는 두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매일 점심식사 후에 가까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말씀을 읽고 서로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카페 기도회를 1년 가까이 했을 때 내 마음에서 칠흑 같은 어두움이 사라지면서 먼 바다에서 큰 배 하나가 나타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으며 그 날의 기도를 마쳤다. 하나님께서 카페에서 드린 우리 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분명했다.

* '신앙계' 12월 호에 실린 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