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궁금한 몇 가지를 질문했다. “왜 북한 선교를 시작했는가? 고문은 없었는가? 악풀은 없었는가? 트라우마는 없는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모두 명쾌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진한 경험에서 녹아 나오는 대답은 항상 명쾌한 법이다.
    그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인이지만 캐나다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외국인은 안전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것은 위험의 요소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왔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고 품어주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 날이 속히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임 목사님은 북한에 있는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목회와 삶으로 헌신해 왔다. 그러나 김정은이 권력을 이어 받으면서 내부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북한은 그를 억류하고 사지로 몰아 넣었다. 참으로 불의한 권력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기를 기도했다. 
    “목사님 한국인을 위해서 캐나다 정부가 재정과 외교에너지를 사용하는 일로 인해서 네티즌들의 악플은 없었나요?”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플이 줄줄이 달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격려하는 편지와 전화와 방문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어떤 가족은 자녀들을 데리고 찾아와서  ‘그동 안 자녀들과 함께 임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이렇게 돌아오시니 감격스럽습니다.'라고 했어요.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 극장에 갔는데 지휘자가 저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인사를 시켰고 모든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냈어요. 그들은 저의 고난에 한 마음으로 동참해 주었어요.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얼굴이었지요.”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얼굴. 가슴에 팍 와 닿았다. 고난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기적의 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