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에서 법 공부를 마치고 파리에 올라 온 칼뱅은 인문주의자의 입장에서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써서 1532년에 출판한다. 세네카가 네로에게 똘레랑스의 중요성을 말했듯이 칼뱅은 프랑스 군주인 프랑수아 1세에게 똘레랑스의 가치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럽과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신앙운동과 인문주의 사상에 대해서 군주는 관용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표현이었다. 이 책의 출판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칼뱅의 예견은 적중했다. 이 책이 출판 된지 18개월 만에 프랑스 땅은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의 발단은 1534년 10월 17일에 일어난 ‘벽보(affaire des placards)’이다.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가 파리와 프랑스 주요 도시에 붙여지고 심지어 앙부아즈(Amboise)성에 있는 왕의 침실 앞에까지 붙여지자 이에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대대적인 박해모드로 전환했다. 수백 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35명이 처형되었다. 칼뱅의 친구인 에티엔느 들 라 포르즈(Etienne de la Forge)도 처형되었고 칼뱅의 형제중 하나도 처형되었다. 나는 루아르 강변에 있는 앙부아즈 성을 방문할 때면 강 건너편에 있는 작은 호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 성을 바라본다. 그러는 동안 16세기에 시작된 박해와 불관용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칼뱅은 바젤로 피신했고 거기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완성하여 1536년에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면서 개신교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그들에게 대한 똘레랑스를 호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