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낭트 성에 가면 낭트칙령에 대한 자료들이전시되어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 부분을 충분히 전시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낭트는 과거 아프리카 노예들이 도착해서 프랑스와 유럽으로 팔려가던 시장터였는데 

그 내용도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에 낭트선한교회를 개척했다. 프랑스 중서부 

지방의 선교거점이 되기를  명하면서. 이렇게 개신교도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36년간의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킨 앙리 4세는 쉴리(Sully)를 재상으로 세우고 

그와 함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백성의 삶을 회복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그를 선량왕 앙리대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암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17차롄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가 개신교 출신이며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는 낭트칙령을 선포했다는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쉴리공작을 만나러 가던 중에 넘쳐나는 마차들로 인해서 정체되어 있는

사이에 마차에 뛰어든 광신적인 가톨릭교도인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똘레랑스를 법으로 만들고 실현하려고 했던 앙리 4세는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선포했던 낭트칙령을 1685년 10월 18일 퐁텐블루 칙령을 통해서

낭트칙령을 스스로 폐지해 버렸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다시 똘레랑스 없는 사회로 돌입했다. 

똘레랑스의 실종은 국가와 백성을 삶을 파괴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