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슨은 미술을 좋아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특정한 직업도 없이 유럽을 돌아다니며 방황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운영하는 학교에 미술선생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프로이트 문하에서 정신분석학을 배우던 에릭슨의 친구가 소개한 것이다. 학교에서 일하던 중에, 프로이트의 집에 모여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모임을 곁에서 보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 그룹은 비엔나 대학 출신의 의사들 모임이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에릭슨이 들어갈 수 없는 자리였다. 그룹원들도 대학을 나오지 않는 그를 반대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를 받아들였다. 대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나 보다. 
 그러던 중에 2차대전이 터지고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게 되었고, 젊은 시절의 방랑끼가 발동해서인지 연구실 대신에 미국의 인디언 보호지역에 들어가 연구하면서 스승을 넘어서는 심리-사회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학교 학위도 없이 하버드 의과 대학교수가 되었다. 나는 에릭 에릭슨이 고등학교만 졸업한 약점과 자유롭게 사는 그의 방랑기질이 전문성보다는 자유롭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견해가 이미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어서 동화와 조절과 종합적으로 보는 힘이 약하다. 하지만 에릭슨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또 다른 한계를 넘어서는 인생 역설을 경험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