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들은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를 관통하는 가치인 자유와 톨레랑스도 저절로 굴러온 것이 아닙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합니다. 귀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이 보물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모든 일에는 그것을 시작하는 ‘초심’, 그 가치를 삶에서 실현하는 ‘열심’, 끝까지 지켜내는 ‘뒷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와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놀라운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가치를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했지만, 율법주의 유대인들의 공격과 회유 앞에서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 너희는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과거의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은혜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톨레랑스를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했습니다. 톨레랑스는 마치 뼈와 뼈 사이에 있는 연골과 같습니다. 연골 없이는 뼈와 뼈가 만날 때마다 부딪쳐 통증이 유발되듯, 톨레랑스가 없는 세상은 모두에게 삭막하며 특히 힘없는 자들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톨레랑스를 통해 근대 유럽 사회는 ‘정치 종교, 도덕, 학문, 사상, 양심의 영역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 말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라는 컨센서스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톨레랑스는 더불어 사는 세상, 민주적인 사회를 떠받치는 정신적 기둥이 된 것입니다.
이 소중한 가치는 권력을 탐하는 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곤 합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자신의 힘과 권력을 백성을 괴롭히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는 ‘관용론’을 써서 네로에게 바쳤습니다. 권력자는 무엇보다 톨레랑스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네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네카에게 자결을 명했습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세속과 종교 권력이 위그노들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을 때,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써서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은 많이 전파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가 힘 있는 자들의 폭력과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당연시했다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