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을 떠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민 4:15)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자장과 자하가 있는데 어느 쪽이 더 어질고 낫습니까?’ 공자는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자장이 더 낫단 말씀입니까?공자가 답합니다. “아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여기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성어가 나왔습니다.

    좋은 일에도 과유불급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고핫 자손에게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를 덮는 물건을 관리할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성물을 만지면 안 됩니다. 그들이 지켜야 할 선입니다. 그 선을 넘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사모하여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기려고 했지요.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이동하는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왔을 때 다윗과 이스라엘 족속이 법궤를 환영하며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소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수레에 있던 법궤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웃사가 다급하게 여호와의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분명히 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치셨고 그는 궤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선한 의도가 선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의도와 열정도 선을 지킬 때 그 가치가 아름답게 빛나는 법입니다.

    톨레랑스와 관련해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그 선을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톨레랑스가 신앙과 양심의 자유, 정치와 언론의 자유를 위한 가치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절대화되고 신앙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톨레랑스가 선을 넘을 때 무질서와 방종이 되어 비진리마저 수용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이해합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톨레랑스라고 하지만 사실은 톨레랑스의 위험한 선을 넘어선 겁니다. 내가 믿는 진리와 신앙을 주장하면 꼴통보수라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새로운 종류의 폭력이지요. 타인의 신앙과 확신을 비난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것을 주장할 자유도 보장되는 사회라야 진정한 톨레랑스 사회입니다. 위그노 후손들이 주류인 프랑스 개신교회들도 요즘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선조들이 생명을 걸고 지킨 성경의 진리보다는 세속의 가치에 매몰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톨레랑스가 그 선을 넘은 것입니다. 세속사회의 가치와 시스템이 톨레랑스라는 이름으로 교회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세속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