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4-6
우리는 지금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시대에 산다는 말이지요. 이런 시대에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은 거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원주의란 말을 들을 때 종교다원주의를 연상해 불편한 마음을 갖는 분들도 많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과 진리,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식의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다릅니다. 다원주의는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더불어 사는 지혜로 현대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입니다. 개신교는 다원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민주적인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불가시(不可視)적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과 지역, 문화에 뿌리를 두고 세워지는 가시적 교회에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색깔에 따른 다양한 의견과 방식이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공동의 신앙고백을 하며 일치(unity)를 이루지만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행동을 하는 획일화(uniform)된 공동체는 아닙니다. 영화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똑같은 초록색 옷을 입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은 획일성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추종자들에게 하나의 유니폼만 입히려 합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구조적으로 계급이 존재하는 서열(hierarchy)이 생겨났고, 그 서열은 독재라는 통치방식을 탄생시켰습니다. 긍정적인 요소도 있긴 합니다. 비상 상황에서 빠른 결정을 통해 힘을 하나로 모으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패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합니다. 16세기에 절대적인 권력 구조를 가진 교회도 절대 부패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교회 권력에 제동을 걸 수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가게 됐습니다. 그것이 중세 교회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 획일성의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타자들을 존중하며, 스스로 겸비하며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