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행복과 고통은 내면의 상태로부터 나옵니다. 영혼이 평화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항상 행복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잃으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외부의 조건에 의지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들은 청량음료와 같습니다. 잠시 마음에 안정을 주지만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멋진 자동차와 원하는 집을 사서 잠시 행복하더라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에 평화가 충만할 때 주어지는 감정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원한다면 내면을 가꿔 평화로 채워야 합니다. 그 평화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만이 우리 내면을 영원한 평화로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요. 평화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의 평화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이 만개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행복을 세상이 빼앗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의 평화로 가득한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이 땅에 홀로 남겨진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두려움은 물러가고 하늘의 평화가 가득했습니다. 성령은 평화의 영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늘의 평화가 가득한 상태와 같습니다. 평화의 영이 임하자 제자들은 세상의 박해를 넉넉히 받아들이고 순교의 자리까지도 기쁘게 갈 수 있었습니다.
위그노들은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이고 개신교회의 예배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박해와 순교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파리는 가톨릭교회의 아성이었습니다.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파리에서만은 그 법이 적용되지 못했습니다. 파리에서 개신교도로 살아간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일단의 위그노들은 가톨릭교회의 본산이었던 소르본 대학 건너편에서 개신교 예배를 드리다 체포되었고 일부는 처형되었습니다. 그 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 그라브롱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형 집행일에 신부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형장으로 이동,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기쁨으로 장작더미에 올라섰습니다. 그 길이 죽음이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납게 타오르는 장작불조차도 성령이 부어주시는 평화와 행복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