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이름을 부르는 신앙이다.
아이콘에는 언제나 이름이 적힌다. 이름이 없는 이미지는 완전한 아이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가진 인격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보는 신앙은 침묵 속의 관조이면서, 말씀과 함께 걷는 시선이다. 이 지점에서 보는 신앙은 우상 숭배와 분명히 갈라진다. 우상은 인간의 상상이 만든 형상이지만, 아이콘은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드러내신 성육신 사건, 곧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에 근거한다.
고대 교부시대에도 아이콘에 대한 논쟁과 성상파괴 운동이 있었다. 핵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려도 되는가?”였다. 성상파괴파(Iconoclasts)는 십계명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성상옹호파(Iconodules)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John of Damascus는 유명한 논증으로 갈등을 마무리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육신이 되어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그린다.”
결국, 2차 니케아 공의회(주후 787년)는 “하나님은 그려질 수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그려지기를 허락하셨다”고 고백하며, 성육신 교리를 시각적으로 완성했다. 다만, 아이콘은 예배(worship, latreia)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veneration, proskynesis)의 대상이라고 했으며, 그 공경도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의 원형(prototype)을 향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콘에 대한 성상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만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회심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아이콘의 원형인 예수님과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성도의 소망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