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6월 4일 체결된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은 은둔의 나라 조선에 ‘신앙의 자유’라는 보편 가치의 문을 여는 사건이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 맺은 일련의 수호통상조약 가운데 가장 늦게 체결된 조약이었다. 조선은 이미 미국(1882), 영국·독일(1883), 이탈리아·러시아(1884)와 차례로 수교를 마친 상태였으나 유독 프랑스와의 수교만은 4년이나 지체되었다. 그 이유는 천주교 박해 문제였다. 조선 조정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통해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 선교사 12명을 포함해 조선인 천주교인 1만여 명을 처형했다. 그해 가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조선에게 ‘프랑스의 천주교는 서양 오랑캐’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것이 양국 수교를 20년이나 가로막은 장벽이 되었다. 따라서 1886년의 조약은 단순한 외교 절차의 마무리가 아니라 20년간의 피와 박해의 기억을 넘어서는 역사적 화해의 사건이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들의 합법적 체류와 사실상의 포교권(布敎權)을 우회적으로 확보했다.
    이는 한국 종교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비록 조선에 신앙의 자유가 ‘선포’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자유가 ‘작동’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포교권을 둘러싼 외교적 타협이었으나 그 이면에서 하나님은 이미 한 세기 뒤 한반도에 펼쳐질 복음의 대로(大路)를 예비하고 계셨다. 뒤늦게 들어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조약의 수혜를 입었고 한국 개신교회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며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