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수많은 위그노가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로 망명했다. 위그노의 스위스 망명에는 크게 두 흐름이 있었다. 16세기 후반에 제네바로 들어온 위그노들이 한 그룹이었고 17세기 후반 낭트령 폐지 이후 남 프랑스 도피네와 세벤느, 랑그독에서 살다 제네바와 로잔으로 들어온 위그노들이 있었다.
    17세기 말 대 피난(Grand Refiuge) 시기에 제네바는 위그노 망명자들의 대표적 통과•구호 거점으로 기능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680-1689년(혹은 1680~1690년) 사이 제네바가 지원한(assister) 망명자는 약 3만 명에 이른다. 특히 1687년에는 하루 최대 350명이 제네바를 통과할 정도로 유입이 급증했다. 스위스 개신교 지역 당국은 이들의 즉각적 필요를 위해 공영 숙소, 여관, 병원 등을 통한 숙박•급식•의료 지원을 동원했고 이동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배나 마차(수레)로 운송 수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렇게 스위스에 정착한 위그노는 정밀공업인 시계산업과 금융업 등을 일으켰고 사회봉사 기관들도 세워 나갔다. 위그노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개혁교회 신앙으로 교육을 받고 자란 장 앙리 뒤낭(1828~1910)은 국제적십자사 를 세웠다.
    다섯째, 1200명 정도의 위그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1688년 3월 20일, 178명의 위그노들이 4개의 배를 타고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떠나 8월 4일, 남아공에 도착했다. 여행하는 4개월 반 동안 19명이 죽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남아공에 도착한 위그노의 다수가 오늘날의 케이프타운에 위치한 프렌치호크(Franschhoek, 프랑스 지역이라는 네덜란드어)에 정착, 농사와 포도주 산업을 일으켰다. 이곳에서는 ‘유레이즈미업’이라는 최상급의 포도주가 생산되고 있다.

 - 「미셔널 위그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