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교사로 헌신하여 타문화 권에서 사역을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장신대에서 신학도로 7년을 보내는 동안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고 준비한 것은 오직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음화가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기 중에도 교회, 직업훈련원, 기도원을 오가며 사역하는 일에 힘썼고, 방학 때는 지리산 전도, 여러 지역의 집회를 인도하며 보냈다. 그러노라면 구두 밑창이 닳아서 구멍이 나곤 했다. 돌아보면 그 때가 내 생애에 가장 뜨겁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전도사로 명성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1년 만에 총회파송 프랑스 선교사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신대 학부와 신대원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선교사가 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혼란스럽기까지 했지만 돌이켜보면 감사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꿈이 무너뜨리시고 그 자리에 주님의 꿈을 심으셨기 때문이다.
불어 한마디 못하는데다가 제주도가 가장 먼 여행길이었던 나에게 프랑스 파리의 생활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세계인의 로망인 프랑스 파리에서 살면서 날마다 에펠탑을 보고 세느강을 오가며 멋진 카페에 앉아 샹송을 들으며 진한 엑스프레스 커피한잔을 마실 수 있다는 기대와 더불어 언어의 장벽, 힘들다고 소문난 유럽 디아스포라 한인목회, 자존심과 콧대가 높은 프랑스인들과의 관계, 유럽이 선교지인가에 대한 확신부족, 유럽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목회를 할 수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내심 두려워지곤 했다. 한 마디로 선교사로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3개월 동안 준비하고 파리에 도착하여 정착하는 5개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시골 어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파송예배가 있는 주일 새벽에 시골에 화재가 난 것이다. 어둠의 영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우리 부부의 마음속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구나! 유럽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