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찰이 18세의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쏴 죽였으나 지난 11월 25일퍼커슨 시 대배심원은 그 경찰관에게 살해 의도가 없었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리면서 미국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미국 경찰이 또 다시 43세 된 흑인의 불법적인 담배판매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의 목을 과도하게 오랫동안 조른 결과 사망하였으나 지난 12월 3일 대배심원이 그 경찰을 불기소하면서 미국은 또 다시 인종차별 문제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고 보수적인 미국교회들까지도 앞장서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공권력에 의해서 목이 졸리면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외쳐대던 그 흑인의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오늘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지구 곳곳에서 강한 자에 의해서 목이 졸리면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이런 일은 먼 동네 불구경이 아니다. 지난 7년간 그토록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일을 함께 해 오던 프랑스 교회의 돌변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그동안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95%이상 그들의 일에 우리가 협력했다. 우리는 양심적으로 거리낌 없이 최선을 다해 협력했다. 우리가 예배당을 사용하는 시간이 많아서 불균형하다하여 예배시간을 압박하였으나 교육관을 마련하고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그곳으로 옮기고 시간과 장소를 비워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일예배에 대한 압박도 유지하고 사용료도 두 배로 올린 것을 유지하는 것을 당회에서 투표에 붙여서 통과시켰다고 통보해 왔다.

불쾌한 생각에 잠을 설쳤다. 왠지 가진 자의 차별 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경찰과 배심원이 저지른 일을 교회와 목사는 저지하고 나섰는데 자유 박애 평등을 외치는 프랑스는 교회와 목사가 앞장서서 자매된 교회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양아치들도 의리 운운하는 법인데 지난 7년간 함께 먹고 일하고 나누며 지내왔던 그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것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관계인데, 한 움큼의 이익을 위하여 소토록 소중한 관계를 저 버리고 목을 조여오니 숨이 막힐 뿐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던 아름다운 관계가 이렇게 순식간에 갑과 을의관계로 바뀌어 목을 조르니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소리치고 싶다. 이러다가 그 동안 내 마음속에 그려진 프랑스인들에 대한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이미지에 손상이 갈까 걱정이다.

정의감으로 저항해서 바로잡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상황에 순응하여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오늘도 나는 두 갈림길 어귀에 서서 깊이 고민한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오직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역대하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