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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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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성원용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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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초년생이었다. 서울 명성교회에서 전임전도사로 사역하던 중에 3개월 갑자기 프랑스로 발령이 나서 3개월 준비하고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어도 파고다학원 3개월 다닌 것이 전부였고, 해외 생활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전무했다. 게다가 결혼 1년 동안에 아내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으로 나는 명성교회 전임 전도사로 바쁘게 살아가면서 집안 살림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김치를 담그는 것은 고사하고 라면을 겨우 끓일 수 있는 정로라고나 할까? 경제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년 후에는 우리나라에 IMF위기가 오면서 우리 파리 생활은 긴박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오는 생활비는 그 나마 반으로 줄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13구에 나가서 통끼누와(월남국수) 한 그릇 사 먹는 외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보냈다. 급기야 양가 부모님들로부터 크고작은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div>이렇게 시작된 프랑스 생활에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은 분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오경희 집사님이라는 분이다. 당시 대우자동차 법인장으로 파리에서 근무하던 권영철 집사님의 부인이다. 파리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한번 만난 적은 있으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집사님은 기도의 동역자이며 기도의 후원자로 자처했다. 늘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했고, 파리에서 CRETEIL라는 먼 곳까지 새벽기도회에 매일 참석하며기도했다. 3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기도했다. <div>우리가 살림에 미숙하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3년을 김치를 손수 담가서 제공했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IMF를 당해서 매월 납입금을 지불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자 2년간 납입금의 일부를 지원했다. 벼랑 끝에 서서 주님께 기도만 했을 뿐인데 주님께서 오 집사님을 붙여주신 것이다. 천사를 붙여주신 것과 같았다. 그 3년동안 우리는 프랑스 생활에 정착할 수 있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해외생활과사역의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잘 살아오고 있다. 지금은 명성교회 권사님이 되셨고, 두 아들은 의사와 변호사가 되었고, 외동딸은 목사의 부인이 되었고, 남편 권 집사님도 이제는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하시게 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만나고 기도로 교통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분이다.</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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